시간. 장송의 프리렌. 어바웃 타임.
전혀 다른 듯 보이는 두 작품의 공통점을 찾아보며 시간과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자
원래 블로그 글은 좀 더 읽기 편하게 ~요, ~ 했습니다 체를 쓰려고 했는데요, 이번 글은 그런 갬성의 글은 아니라 그냥 평서체로 고고싱 하겠습니당.
2024년 올해. 30살이 되기 싫다는 생각은 훨씬 짙어졌다. 왜 이렇게 30살이 되기 싫을까?
20살이 되었을 때에는 정말 별 생각이 없었다. 19살과 20살 혹은 고딩과 갓 성인은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 둘 다 애일 뿐이다. 술이야 같이 먹을 만한 어른을 찾기도 쉬웠다. 담배는 원래 관심이 없었다. 19세 콘텐츠야 어둠의 경로를 통하면 될 일이었다. 대학은 어차피 거리감 있는 장소였으니 마찬가지로 안중 밖이었다. 또래란 열혈의 대학생들이고 물불 가리지 않고 무서움이 없는 자식들이었다. 청춘이지.
그런데 30살은 좀 다르다. 혹자는 한창이라고들 한다.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30살도 아직 새파랗게 어린 풋내기라고 한다.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내 뇌는 조선시대에 머물러있나? 남자는 20대에 결혼하고 여자는 20대 초반에 결혼하고 애기를 낳고 가정을 꾸리라는 암시가 유전자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나? 30살은 내게 굉장히 상징적이다. 유별스러움과는 좀 거리가 있는, 안정적인 느낌. 청춘은 지나가고. 자리는 잡히고. 윤곽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손등의 주름도 좀 더 선명해지는 나이.
문턱. 나는 지금 문턱에 와있다.
지금까지 남들보다는 조금 더 노력해서 살았는데, 시간이 아깝다는 것에 그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노력을 들이는 게 어렵지 않았을 뿐이었다. 한 자리에 앉아서 좀 더 오래 잘 버틸 수 있고, 성격도 무던하다.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가 크지 않다. 도파민 감수성이 낮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30살이 되기 싫으니 시간이 아깝기 시작했다. 작년에는 더더욱 다채롭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평생 해보지 않은 봉사활동을 하면서 인생에 딱 한번만 경험하면 좋을 것들 - 이상한 공연도 하고 일일주점도 했다. 조금이라도 젊을 때 가장 능률이 좋으니 회사 일도 열심히 했다. 에너지를 잃기 싫어서 짬을 내어 운동도 계속 한다.
그러나 시간은 지나가기 마련이다. 곧 문턱을 넘을 뿐만 아니라 제2의 제3의 문턱도 지나가버려 곧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운명을 자각한다. 운명. 나는 운명에 유려하게 대처하는 법을 알기 위해 작년에 … 책을 한 권 읽었는데 도무지 내용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 이것 봐라. 책 제목도 기억이 안 난다. 기다려봐. 카뮈… 알베르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이다. 올해 한번 더 읽어야겠다.
최근 자극을 받은 작품은 장송의 프리렌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원작은 만화. 아직 연재 중일 거다. 정통 판타지의 설정을 명료하게 따르고 있다. 주인공인 프리렌은 엄청 오래 살 수 있는 엘프 마법사이다. 다른 작품과 좀 다른 점은, 현재라는 시점에서 이미 마왕은 토벌되었고 용사인 힘멜이나 사제인 하이터는 이미 늙어서 죽어버렸다는 것. 프리렌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일족을 잃었던 트라우마가 심했던 건지, 천년 동안 고립된 채로 살아와서 그런 건지, 하여튼 바이올렛 에버가든 마냥 인간의 감정에 둔해빠졌다. 과거의 흔적을 되짚어가면서 인간의 마음을 알아가며 조금씩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잔잔하다.
그리고 얼마 전에 다시 본 영화, 말도 안되게 예쁜 레이첼 맥아담스가 등장하는 어바웃타임. 남자주인공인 팀은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 사실 그 집안의 남자들은 전부 시간여행자이다. 막 특정 시점으로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자신이 존재했고 기억하는 때로 언제든지 갈 수 있다고 한다. 완전 사기적인 능력이다. 마음만 먹으면 부자도 될 수 있고 못할 것이 없겠지만, 팀은 사랑을 위해 인생을 바쳤다. 메리와의 사랑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식들, 자신의 동생, 아버지, 어머니, 기타 주변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자기자신과의 사랑까지.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고 시간 여행을 더이상 하지 않는다고 독백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두 작품의 플롯엔 큰 차이가 있지만 주제에는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들의 시간 감각은 남들과 다르다. 프리렌은 너무 오랫동안 살아온 나머지 덧없음에 너무 취해 지금 그 순간 같이 지내던 사람들과의 소중함을 간과하다가 점차 깨달아가며 성장한다. 팀은 얼마든지 시간을 벌고 기회를 취하고 전지전능해지면서 이윽고 덧없음이란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음에도 굳이 그러지 않고 인간의 고유한 삶에 만족하며 현재에 충실한다. 정리하면, 너에게 시간이란 게 아무리 많다 한들 주위 사람들은 찰나이고 너무너무 소중하다. 그러니 잘 해라.
그리고… 나는 썩 맘에 들진 않는다. 아니, 그렇다기 보다, 그냥 작품은 작품이구나 싶다. 실제로 내 상황과 비교해보건대, 결코 현실적이지 않다. 완전 판타지. 작품의 분위기에 함께 취해서 잠시 현실의 어려움을 잊기 위한 은신처.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이 안좋은 건 아니다. 어바웃타임은 좀 지루하고 장송의 프리렌은 아련함과 감동이 있긴 한데, 그건 현실성 여부와는 상관이 없다. 그리고, 은신처. 좋잖아. 잠시 인생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다.
현실적이지 않다고 느낀 포인트는,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명료하고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힘멜은 경외스러울 정도로 인간성이 좋고 착하고 능력도 좋다. 주변 인물들도 다 괜찮다. 팀의 아버지는 정말 이상적인 아버지의 표본이며 메리는 예쁘기도 하고 성격도 괜찮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점은, 다들 솔직하다는 것이다. 무서우면 무섭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고마우면 고맙다고 표현한다. 만에 하나 오해가 있다 하더라도 금새 풀리며 전반적으로 갈등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솔직함이란 갈등을 없애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현재가 소중하다는 메시지는 알겠다. 그러나 나는 평범한 인간이므로 현재가 소중하다는 것을 느낄 만한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어떻게든 주어진 시간 안에 많은 걸 깨달아야 한다! 솔직해지는 것도 쉽지 않다. 기회는 얼마 없다. 완전하고 이상적인 사람이란 내 주위에는 없다. 다들 인간적이고 솔직해지기 어려워한다.
내가 30살이 되면 두번 다시 20대로 돌아갈 수 없다. 그때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종류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고 땅을 치며 후회해봤자 소용 없다.
돈이 썩어넘치는 사람이 과소비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면, 심금에 기별도 안갈 것이다.
… 나는 작품 감상과 관계 없이 초조해질 뿐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
… 별 수 있나. 작품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할 수 밖에.
…
주위 사람들에게 잘 하자. 나한테도 잘 하자.
…
올해의 키워드는 정리, 재미, 건강으로 잡았다. 해왔던 걸 정리하고, 재미와 건강을 추구할 것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잘 하는 건 "정리"에 해당한다.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도와준 모든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면서 빚을 청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좀 더 문턱을 넘을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과연 그럴까?
모르겠다.
지금에 집중하자.
지금에 집중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도 모르는 새에 문턱이 지나쳐져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