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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가을 블로그

리뷰2024년 02월 25일--views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금 읽고...

모조리 추상화해버리는 세상에 맞서기

일요일 오전에 아아 한잔과 함께 읽는 책
일요일 오전에 아아 한잔과 함께 읽는 책

이상한 일이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최소 2번 읽었고, 이번까지 합한다면 최소 3번은 될 터이다. 그런데도 별 흔적이 없었다. 평소에 좋아하는 소설이라며 이 책을 소개해온 만큼 대문짝하게 어떤 감상문이나 리뷰가 있을 줄 알았다. 내 모든 공공 디지털 보관소(일명 블로그)를 뒤져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았다. 좋아하는 책이긴 하지만 좀 더 기승전결이 명확한 ≪멋진 신세계≫는 감상문을 써놨다. 지금 내가 찾는 건 아니니까 훑어보는 듯한 인사치레도 없이 슝 하고 지나쳤다. 그나저나 ≪멋진 신세계≫는 지금껏 다시 찾은 적이 없다. 읽었을 때의 느낌은 아직까지 내 속에서 살아 있고, 그 이유 또한 명확하다. 다시 읽었을 때의 내 느낌을 명확하게 상상할 수 있다. 반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감각은 잊혀지기 쉬워서 읽고 싶은 욕구가 주기적으로 든다.

다행히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흔적이 박멸된 건 아니었다. 실마리는 일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여기는 비공개 디지털 보관소. 겨우 군대 4개월차에 휴가를 나왔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당시 외할아버지의 부고가 있었는데, 나와 함께한 추억이 있었던 분은 아니어서 동요는 하나도 없었다. 의무적인 스케줄이 하나 생긴 게 좀 그랬을 뿐. 장례식에는 잠깐 들렀고 온 부산을 들쑤시고 다녔다. 부산대 앞 NC백화점의 교보문고에서 유시민의 ≪나의 한국 현대사≫와 함께 '참존가'를 샀다는 기록이 최초였다(유시민의 책은 더더욱 기억이 없다).

참존가? 문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 제목이 너무 길어 참존가로 줄여서 일기에 쓴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래서 그걸로 또 검색을 하여 찬찬히 보니, 그랬었지. 참존가 영문판 읽기를 시도했었지. 웃기기도 해라. 그만큼 나는 책이 맘에 들었던 것이다. 갑자기 허접한 선으로 이루어진 강아지 그림이 있는 표지가 떠올랐다. 너무나도 흐릿했던 사실들(꿈에서 본 적이 있다고 해도 차이가 없을 것들)이 있었다.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내가 좋아하던 누나가 추천해줘서이고, 군대에서 두 번이나 읽었고, 통영 한달 살이를 할 때에도 이 책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지금 2024년 또다시 그 감각이 그리워져 집 근처 신림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책을 산지 채 24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다 읽어버렸다. 예전에 샀던 책은 누군가에게 빌려준 것 같은데, 도무지 누군지 기억이 안난다.

책은 대략 500페이지. 30분에 50페이지를 읽는다면 대충 5시간 걸린다. 책을 읽으면 졸리기 마련이라 중간에 엎드려 자기도 하고 딴짓도 하면서 한가로운 주말을 책과 함께 보냈다. 일요일 아침 8시에 문을 여는 매머드커피의 싸구려 아이스아메리카노와는 궁합이 생각보다 좋았다. 테이크아웃 하여 집에 앉아 책을 마저 다 읽었다. 고백하자면, 이 책을 읽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 전까지 심란하고 싱숭생숭했던 마음이었다. 겨우 책 한권으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게 살짝 자존심이 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나라는 사람의 현실.


나이가 찰 수록 맘에 안드는 게 많아진다. 싫어하는 단어도 하나 둘 늘어난다. 양귀자의 어떤 소설 제목이기도 한 "모순"이라는 단어도 맘에 안든다. 색깔이 없다.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살지만, 동시에 행복과 멀어지게 하는 욕망에 집착한다. 모순이라고 간단히 치부할 수 있지만 너무 성의가 없다. 성의가 없어서 화가난다. 문제를 추상화하는 건 여러모로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미처 추상화되지 않은 특성은 버려진다. 지금은 여기저기서 버려지는 게 너무나도 많고 나 또한 그 커다란 강물에 어쩔 수 없이 합류하는 것 같다. 자본주의의 키치 속에서 너도나도 허우적대고 있다. 너도나도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 끝이 가리키는 곳은 너무 많이 추상화되어버린 자본주의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돈이 잘못일까 아니면 돈을 좇는 사람들이 잘못일까. 내가 봤을 땐 둘 다 아니다. 문제를 추상화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돈이 많으면 행복해진다는 믿음을 퍼뜨리는 사람들이다. 실제 행복은 너무 복잡해서 설명해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돈 하나로 추상화될 것 까지도 아니다. 성의가 없다.

입만 나불대지 않을 뿐이지 똑같이 어쩔 수 없는 커다란 강물에 허우적대고 있는 나. 커다란 추상화의 흐름에 어찌할 바 모르는 나. 돈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단순해졌다. "돈을 좇기 싫다"는 사소한 저항조차 단순해졌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점점 흐릿해진다. 문제가 추상화될 수록 집단수용소의 담장은 높아져만 간다. 이를 인지하고 있지도 못했다. 나의 저항도 성의가 없어져가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문제를 구체화한다. 성의가 있다. 토마시와 테레자의 만남에서, 두 인물은 여러 번 연속으로 발생한 우연에 똑같이 주목하지만 그 태도가 다르다. 토마시는 만약 그 자리에 다른 남자가 있었다면 테레자는 그 남자를 사랑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심기를 불편해했다. 테레자는 토마시와 함께 했을 때의 발생한 우연들을 운명이라 여기고 토마시를 따라 프라하로 갈 결심을 한다. 심지어 작가도 한마디 거든다. 작가는 평소에도 우연이란 항상 빗발치고 있는 하찮은 것들이라 거기에 의미를 얼마나 부여하냐에 달렸다고 한다. 단순해보이는 현상도 참존가의 세계에서는 다방면으로 구체화된다. 구체화는 인물들 뿐만 아니라 시간(과거-현재-미래)을 드나들기도 한다. 인물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지만 자기 자신만의 방식으로 응답하고 요청한다.

나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구체화하는 감각을 되살려주기 때문이다. 갑갑한 현실이 바뀌는 건 하나도 없지만 도시 속 한낱 부품이었던 나를 동네 언덕으로 데려올라가서 도시의 전경을 감상하도록 한다. 현실과 잠시 동떨어져서 나를 관찰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나 자신을 관찰한다는 건 메타인지를 높여준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세상을 재발견하게 하는 건 여행과 같다. 저기 저 일본 촌구석에 가서 8박 9일 동안 낯선 환경에서 동네 주민처럼 소소하게 지내는 것만이 여행이 아니라는 거다(실제로 다음달 계획되어 있는 여행이다). 책을 읽고 동네 산책을 나갔는데, 내 주위 환경이 다르게 느껴졌다. 오래된 카센터 간판도 왠지 더 주목하게 되었다. 저 카센터 간판에 주목하게 된 사건은 커다랗고 연속된 우연 중 하나는 아닐까? 신이 기획한 판놀음을 인지해버린 게 아닐까? 그래서 운명이 바뀌는 건 아닐까?

책을 읽고 내 주위의 문제들이 충분히 구체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은 것이다. 나는 줄곧 구체적이라고 생각했다. 커리어를 정리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이직을 준비할 때 한발짝 나아가는 게 왜 그렇게 부담스럽게 느껴졌는지 몰랐다. 마치 큰 담장을 한번에 넘으려고 마음을 다잡는 기분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커다란 강물에 허우적대고 있는 꼴도 몰랐다. 내가 가늠했던 한발짝은 실제론 한발짝이 아니라 열발짝 백발짝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좀 더 천천히 가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좀 더 뚜렷해진다. 추구해야 할 가치가 얼마나 다양한지. 세상은 생각보다 아름답다.

구체적이라는 건 뾰족하다는 것과 같다. "돈"이나 "모순"은 뭉툭한 반면 이 책은 뾰족하다. 여러모로 작가의 묘사에서 나는 뾰족함을 느꼈다. 현기증(추락의 욕구)라든지, 어깨 위에 운명의 참새가 날아 들어왔다든지, 똥이라든지. 나 또한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현기증을 느껴본 적이 있지만 그걸 표현할 길은 없었다. 책에서 뾰족하게 표현할 수록 소설의 허구성이 강조되긴 하겠지만 동시에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구나" 하는 자유로움을 선사한다.

하겐다즈딸기설빙을 시켰을 때 딸려온 67kcal 짜리 순연유소스 정도면 뾰족하다.

몇년 전 이 책을 읽었을 때도 똑같은 느낌이었겠지. 이 감각은 또 가물가물해질 것이고 그때 나는 다시 이 책을 찾을 것이다. 그 때를 위해 책을 좀 잘 보관해놔야지.


이번에 책을 읽기 전 토마시가 테레자에게 가졌던 동반수면의 욕구는 똑똑히 기억했지만 프란츠와 관련된 부분은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의 중반 이후 행적도 거의 잊었다. 다음을 위해 조금 적어두자. 토마시는 하찮은 저항심 때문에 의사를 그만두고 창문닦이 일을 하다 최후에는 테레자와 시골에서 산다. 테레자는 카레닌과의 유대를 인간의 것과 비교하고 여전히 불안해한다. 사비나는 가벼움을 추구하기 위해 프란츠를 배신하고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미국에서 토마시의 아들로부터 그들의 죽음을 전달받는다. 프란츠는 음악과 혁명을 동경하는 단순한 대학 교수로, 사비나를 맘 속으로 섬긴다.

끝.